자율은 스위치가 아니라 다이얼입니다: 은행이 능력보다 먼저 사는 것
발주 공고 한 줄을 현미경으로 보면
오늘 아침 다이제스트에서 가장 조용한 기사는 은행연합회의 단독 소식이었습니다. 협회가 AI 도입 전략 수립 용역을 발주했다는 짧은 내용입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 용역이 만들어 낼 산출물입니다. 새 모델을 붙이는 것도, 챗봇을 배포하는 것도 아닙니다. 업무 특성을 분석해 과제를 발굴하고, 국내 소버린 AI와 글로벌 빅테크 AI와 전문 솔루션 AI를 비교하고 평가하며, 단계별 도입 로드맵을 세우는 일입니다. 계약 기간은 세 달, 이달 안에 우선협상대상자를 뽑습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능력이 문제라면 이미 시장에는 강력한 모델이 넘칩니다. 그런데 왜 은행은 모델을 먼저 사지 않고 순서부터 그릴까요. 이 물음을 붙잡고 오늘 뉴스 전체를 다시 읽으면, 서로 다른 회사들이 사실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AI 도입의 승부처는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는가로 옮겨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은 여전히 하드웨어로 흐릅니다
물론 자본의 물길은 아직 실리콘 쪽에 있습니다. 오늘만 봐도 한미반도체가 HBM4 전공정 장비 수요에 힘입어 2분기 영업이익 1303억원, 전년 대비 51퍼센트 증가한 창사 최대 분기 실적을 냈습니다. 메모리 3사는 올해 HBM 생산량을 두 배 이상 늘리고도 수요 초과로 내년 가격 인상을 예고했고, SK하이닉스는 용인 Y1 팹의 장비 발주를 시작했습니다. 최태원 회장은 이것을 두고 사이클이 아니라 산업의 진화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하드웨어로 흐른다고 해서 병목까지 하드웨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칩이 아무리 빨라도, 그 칩 위에서 무슨 일을 어디까지 시켜도 되는지를 정하지 못하면 규제 산업은 한 발도 못 뗍니다. 은행연합회가 산 것이 성능이 아니라 기준이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규제 산업은 능력이 아니라 순서를 먼저 삽니다
은행연합회의 로드맵이 개별 은행이 아니라 업권 협회 차원에서 나온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협회가 정한 도입 순서와 모델 평가 기준은 회원 은행들의 사실상 표준이 됩니다. 즉 한 곳이 아니라 업계 전체가 같은 문법으로 AI를 들이게 됩니다. 마침 금융당국이 망분리 규제에 예외를 두어 내부망에서도 클라우드 기반 서비스를 쓸 길을 열고 있어, 이 문법이 자리 잡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결의 움직임이 공공에서도 나왔습니다. KT와 네이버클라우드 컨소시엄이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혁신 ISP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습니다. 이 사업의 본질도 새 기능이 아니라 분류입니다. 대전 본원의 공공 정보시스템 693개를 N2SF 등급과 중요도, 경제성, 안정성을 기준으로 공공 데이터센터에 남길지 민간 클라우드로 옮길지 가려내는 작업입니다. 2024년 9월 대전센터 화재 이후 재설계된 국가 시스템 운영 체계의 후속 조치입니다.
두 사례가 말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규제 산업에서 도입의 첫 단계는 배포가 아니라 등급 매기기입니다. 무엇을 먼저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어디까지 맡겨도 되느냐를 정하는 일이 먼저 옵니다. 능력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이 신중함은 대중의 속도와 뚜렷이 대비됩니다. 같은 날 챗GPT는 올 상반기 국내 사용자 증가 1위에 오르며 국민앱 소리를 들었고, SKT의 독자 모델 독파모 정예팀에는 SK AX와 테크노매트릭스가 합류하며 제조와 공공 실증이 빨라졌습니다. 업비트는 AI와 대화하며 매매 전략을 검증하는 백테스트 도구를 베타로 내놨습니다. 개인과 도메인 서비스는 이렇게 앞으로 달려 나가는데, 은행과 공공은 오히려 속도를 늦춰 순서를 그립니다. 이 온도차가 우연은 아닙니다. 잃을 것이 많은 쪽일수록 자율의 다이얼을 천천히 돌립니다.
자율은 스위치가 아니라 다이얼입니다
그렇다면 자율의 최전선은 어떨까요. 오늘 SAP코리아가 서울에서 자율형 기업 청사진을 내놨습니다. AI 에이전트가 프로세스와 데이터에 내재돼 스스로 감지하고 판단하고 실행한다는 그림입니다. 대화형 어시스턴트 쥴이 재무와 구매, 공급망, 인사, 고객 영역에 걸쳐 50개 넘게 배치되고, 각 어시스턴트가 그 아래 200개 넘는 특화 에이전트를 조율해 좁고 정확한 작업을 실행합니다. 삼성전기는 이 전환 과정에서 시스템 비가동 시간을 144시간에서 34시간으로 76퍼센트 줄이며 제조라인 중단 없이 넘어간 사례로 소개됐습니다.
주목할 것은 SAP가 제시한 네 개의 축 가운데 하나가 처음부터 거버넌스라는 점입니다. 가장 자율적인 그림을 그리는 회사조차, 자율과 통제를 한 묶음으로 팔고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자율은 켜고 끄는 스위치가 아닙니다. 어느 업무를, 누구의 승인 아래, 어느 선까지 에이전트가 스스로 처리하게 할지 단계로 돌리는 다이얼입니다. 재무와 인사, 공급망처럼 민감한 프로세스를 위임하려면 개인정보보호법과 전자금융거래법 준수,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 추적성이 전제가 됩니다. 국내 특유의 다단계 결재 문화와 에이전트의 자율 실행 사이를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도입의 성패를 가릅니다.
돈을 부어도 전략이 안 생기는 이유
반대 방향의 증거도 오늘 나왔습니다. KT는 앞으로 5년간 통신과 AI에 18조원을 투자한다고 밝혔습니다. 그중 12조원은 3년간 기존 통신 사업 강화에, 6조원은 5년간 AI 데이터센터와 해저케이블 같은 인프라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시장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자체 모델과 에이전트 경쟁력은 오히려 뒤로 밀렸고, 정부 주권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에서도 고배를 마셨다는 지적입니다. 막대한 자본을 부어도 AX 플랫폼 컴퍼니로의 전환이 저절로 따라오지는 않았습니다.
이 대비가 오늘 뉴스의 골격을 드러냅니다. 능력의 반대말은 무능이 아니라 통제이고, 지출의 반대말은 절약이 아니라 설계입니다. 인프라에 쓴 돈은 실행 계층에서 통제된 자율로 번역되지 않으면 전략이 되지 못합니다. 은행연합회가 로드맵을 먼저 그리고, 국정자원이 등급을 먼저 매기는 이유가 바로 이 번역의 어려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소버린은 어디에 두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증명하느냐입니다
마지막 조각은 소버린의 정의를 다시 씁니다. 국내 AI 인프라 기업 모레의 이기종 소프트웨어가 UN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이 주최한 AI for Good 글로벌 서밋에서 혁신 사례로 선정됐습니다. 이 소프트웨어는 엔비디아뿐 아니라 AMD와 텐스토렌트처럼 서로 다른 제조사의 가속기를 하나의 자원처럼 묶어 운영합니다. ITU가 평가한 지점은 성능 수치가 아니라, 특정 하드웨어에 묶인 폐쇄 생태계를 개방적이고 지속 가능한 구조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소버린을 데이터를 국경 안에 둔다는 위치의 문제로만 이해하면 절반만 본 것입니다. 진짜 소버린은 특정 벤더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가속기 위에서도, 어떤 모델을 골라도 운영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개방성이 국제기구의 인증까지 받은 배경이 여기 있습니다. 규제 산업이 원하는 통제 역시 결국 이 증명 가능성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이얼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뉴스를 한 줄로 묶으면 이렇습니다. 규제 산업은 능력보다 통제를, 위치보다 증명을, 배포보다 순서를 먼저 삽니다. ThakiCloud의 Agent-Native Cloud인 Paxis는 정확히 이 요구를 일급 리소스로 다루도록 설계된 정식 제품이며, 지난달 v1.1으로 정식 출시됐습니다.
Paxis에서 에이전트가 다루는 Skills와 Tools는 각각 독립 모듈로 캡슐화되고, 그 위에 Policies와 Audit Logs가 나란히 놓입니다. 은행이 로드맵보다 먼저 요구하는 것, 즉 무엇을 어디까지 맡길지 정하는 통제와 그 실행을 나중에 되짚을 수 있는 추적성이 부가 기능이 아니라 뼈대에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자율도는 L0에서 L3까지 단계로 나뉩니다. 앞서 이야기한 다이얼이 실제 런타임 개념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사람이 매번 승인하는 단계에서 시작해, 신뢰가 쌓인 업무만 골라 다이얼을 위로 돌릴 수 있습니다.
민감한 작업은 격리된 샌드박스 안에서 실행되어 사고의 반경을 처음부터 제한합니다. 무언가 잘못되더라도 그 여파가 격리 경계를 넘지 못하게 막는 구조는, 감사 로그와 함께 규제 산업이 도입 전에 가장 먼저 확인하는 항목입니다. 소버린과 온프렘이 필요한 곳에서는 쿠버네티스 기반의 ai-platform 위에서 GPU 자원과 모델 서빙을 격리해 운영합니다. 국정자원처럼 등급이 높아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시스템, 망분리 요건이 엄격한 금융권이 바로 이 자리에 해당합니다. 은행연합회가 발주한 모델 비교와 평가라는 숙제는 CostRouter가 작업별로 최적의 모델을 고르는 런타임 정책으로 이어집니다. 어느 모델에도 묶이지 않는 개방성이 소버린의 증명 가능성과 만나는 지점입니다.
SAP가 자율형 기업의 그림을 그리고 은행이 그 그림을 들일 순서를 고민하는 지금, 빠진 조각은 대개 더 강한 모델이 아닙니다. 통제된 자율을 안전하게 돌릴 실행 계층입니다. 스위치를 하나 더 켜는 대신 다이얼을 신중하게 돌리려는 조직이라면, 그 다이얼이 이미 손잡이째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 출발점을 조금 앞당겨 줄 것입니다.